조선후기의 농사 방법,상인,화폐에 대해..
농업 기술의 발달
(1) 왜란과 호란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활의 터전인 농촌이 황폐해졌다. 따라서 나라와 백성
들은 농촌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2) 나라에서는 농토를 늘리고 수리 시설을 보완하여 많은 수의 크고 작은 저수지를 만들었
다. 그 중에서도 수원의 서호, 김제의 벽골제, 홍주의 합덕제, 연안의 남대지 등이 가장
큰 저수지로 손꼽힌다.
(3) 농민들은 개량된 여러 농사법을 실천해 보는 등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하였다.
① 이앙법의 보급 :
이앙법(모내기)은 논에다 직접 볍씨를 뿌리는 직파법과는 달리 모판에서 모를 길렀다가 논에 옮겨 심는 것이다. 가뭄에 취약한 약점이 있어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으나 수리 시설이 보완되고, 수확량이 많은 반면 제초 횟수가 적고 수월하여 노동력이 훨씬 절감되며 (20명이 필요했던 것이 3명 정도로 줄어듦), 모판에서 모가 자라는 동안 농토를 그만큼 더 이용할 수 있기에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② 견종법의 보급 :
견종법은 이랑에다 작물을 심는 농종법과는 달리 고랑에 심는 것으로 바람을 막아 종자를 보호할 수 있는 등 밭농사에 특히 효과가 커서 보리와 밀농사에 유용하였으며 이앙법과 마찬가지로 수확의 증대와 노동력의 절감을 가져왔다.
③ 시비법의 개발 :
시비법은 비료의 양과 질을 높인 것으로, 인분의 이용 및 비료의 종류도 다양해져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드는가 하면, 가축의 분뇨를 이용하고 벼나 보리의 짚을 태워서 토양의 유기질을 늘리고 질소 성분을 증가시켰다.
④ 구황 작물의 생산 :
가뭄이나 장마에 영향을 받지 않아 기름지지 않은 땅에서도 가꿀 수 있어 흉년으로 기근이 심할 때 주식으로 대용할 수 있는 구황 작물이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구황 작물인 고구마는 일본에서, 감자는 청에서 각각 도입되었다.
⑤ 농민층의 계층 분화 :
새로운 농법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늘어나고 노동력이 절감되는 속에서 1인당 경지 면적이 확대되어 빈부간의 계층 격차가 커졌다. 또한 지주들이 적극적으로 토지를 늘려가는 과정에서 양민의 토지를 약탈하는 경우도 늘어나 소작농이나 날품팔이로 전락하는 농민도 생겨났으며 일부는 농촌을 떠나기도 하면서 농촌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상인
조선은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의 신분구분을 바탕으로 구성된 사회였으며 상인은 장사치라는 말이 있듯이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는 집단이었다. 또한 조선사회는 기본적으로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자급자족 사회였으며 제도적으로도 자유롭게 상업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도 않았다. 오직 국가로부터 허가된 시전상인만이 상업활동에 종사했는데 이들의 역할도 주로 궁궐에 필요한 물건을 납부하는데 불과 했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임진왜란 이후 토지의 황폐화 때문에 더 이상 자급자족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여기에 인구증가와 농업기술, 상공업의 발전과 화폐유통과 대외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조선사회는 상업적으로 도약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회적 여건을 바탕으로 성장한 사상(私商)들은 도고(都賈) 도고(都賈): 조선 후기 상품의 매점매석을 통하여 이윤의 극대화를 노리던 상행위 또는 그러한 상행위를 하던 상인이나 상인조직. 도아(都兒) ․외목(外目)장수라고도 하였다. 본래 특권상인이던 공인(貢人)들이 공납품을 미리 사서 쌓아두던 창고를 뜻하였는데, 조선 후기 이후 대규모 자본을 동원한 매점상업이 등장하면서 이런 뜻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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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통해 부를 축적해 나가며 시전상인과 경쟁했다. 마침내 1971년에 정조에 의해 시전(市廛)의 국역(國役)은 존속시키면서 도가(都價)상업에 대해 공식적으로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조선후기 사회의 상업활동은 기존의 시전상인 중심에서 송상(松商)이나 강상(江商) 같은 거대 상업자본에 의해 주도되게 된다. 따라서 상업에 종사는 사람 즉 상인(商人)도 그 종류가 다양화되게 된다. 국제무역의 경우 조선초기에는 역관(譯官)을 중심으로 역관의 이익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이루어 졌으나 조선후기에 후시무역(後市貿易)을 중심으로 의주의 만상(灣商), 동래의 내상(來商)등이 성장하여 관무역 중심에서 사무역 주도로 변화하게 된다.
화폐
상공업 활동을 규제하여 거래가 부진하였던 조선에서는 화폐의 보급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추진되었다. 태종 때에 발행한 저화(楮貨)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고, 세종 때에 조선통보(朝鮮通寶), 세조 때에 화살로 겸용할 수 있는 팔방통보(八房通寶)를 발행하여 유통시키고자 하였으나, 상업활동의 부진과 화폐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여전히 미곡과 포목으로써 물물교환식 거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상공업이 발달하고 화폐에 대한 수요가 커지게 되자 인조 때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전을 처음으로 주조하였는데, 숙종 때에는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에는 세금이 금납화되면서 화폐는 1차적 유통수단이 되어 상품유통을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고종 때의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위하여 국고가 부족하자, 이를 보충하고자 당백전(當百錢)이란 악화를 발행하여 경제적 혼란을 가져 왔다. 이러한 조선의 불안전한 화폐제도는 갑오개혁에 의해 근대적 은본위제도(銀本位制度)의 확립과 더불어 개선되었으나, 이때를 전후하여 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더불어 일본화폐의 횡행으로 통화계에 혼란이 일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