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 농사 짓는 방법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먹고 살았다. 멀리는 선사시대부터 가까이는 조선시대까지 농사는 생계 유지의 수단이자 주된 경제활동이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구는 늘어나도 땅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제한된 땅에서 보다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다.
조선시대에도 그러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농업기술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게 발전하였다. 이앙법과 견종법 이라는 새로운 농사법이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논농사의 이앙법
이앙법이란 벼농사에서 이룩된 새로운 기술이다. 이앙법 이전에는 직파법이 행해졌다. 직파법이 논에 직접 종자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방법이라면, 이앙법은 모판에 심어 모를 자라게 한 후 5,6월 쯤에 제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이다. 옮겨 심는 과정을 우리 말로 `모내기`라 하기 때문에 이앙법을 모내기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앙법과 직파법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앙법은 모판에서 미리 좋지않은 모를 솎아 낼 수가 있다. 또한 옮겨 심기 때문에 모가 두 땅의 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앙법의 최대 장점은 무었보다도 김매기(제초작업)의 노력을 더는 데 있다. 한 여름 내내 농부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다름 아닌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다. 이앙법은 모내기할 때 줄을 맞추어 심기 때문에 직파법과 같이 잡초를 눈으로 일일이 확인하여 솎아내지 않아도 된다. 단지 모가 서있는 줄 사이에 난 것들을 주욱 뽑아 나가면 된다.
또한 튼튼한 벼를 골라 심을 수 있고 또 그 벼가 충분한 양분을 공급받아 잘 자라게 되므로 수확량이 크게 늘어나고(토지생산성의 향상), 김매기가 편리해졌으므로 노동력이 크게 절약된다.(노동생산성의 향상) `이앙법에 비하면 직파법은 열 배의 힘을 쓰고서 십 분의 일의 곡식을 얻는 데 불과하다`는 당시의 기록은 이앙법의 효과가 얼마나 컸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앙법의 효과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앙법을 쓰면 가을에 벼를 수확한 그 땅 위에 보리를 심을 수 있어서 말 그대로 이모작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직파법은 왜 이모작이 안되는가 가을에 심은 보리가 이듬해 5,6월까지 자라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기에 다시 벼를 심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앙법은 봄에 일단 모판에 심었다가 5,6월에 보리를 수확하고 난 후 바로 모를 옮겨 심으면 되기 때문에 이모작이 가능했다.
이앙법은 일년에 두 번까지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지력의 급격한 감퇴를 가져온다. 따라서 이앙법의 발전은 시비법의 발전을 불러왔다. 시비법은 작물을 심기 전에 밑거름을 충분히 깔아주고 작물이 자라는 중간 중간에 덧거름을 주어 지력을 인위적으로 보충해주는 방법이다. 이앙법은 모내기철에 물이 충분치 않으면 농사를 크게 망치게 된다. 따라서 조선 정부는 한 때 이앙법을 법으로 금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수리시설을 확충해 가면서 이앙법을 발전시켜 조선 후기에는 전국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밭농사의 견종법
견종법이란 밭농사에서 이룩된 새로운 기술이다. 견종법 이전에는 농종법이 행해졌다. 농종법은 밭두둑에 작물을 심는 방법이고 견종법은 농종법과는 반대로 밭고랑에 심는 방법이다. 새로 작물을 심기 위하여 밭을 갈았을 때 땅 위로 두툼하게 올라온 부분을 밭두둑, 파인 부분을 밭고랑이라 한다.
그러면 왜 밭고랑에 심는 방법이 더 좋은가 씨앗이 겨울바람을 덜 타 추위에 잘 견디게 한다. 작물이 수분을 쉽게 확보하여 가뭄에 잘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유기질의 침전물을 손쉽게 거름으로 흡수할 수 있다. 또한 이앙법과 마찬가지로 김매기가 편리하여 노동력이 절약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농종하는 것이 견종하는 것에 비하여 노력은 배가 들고 수익은 반밖에 안된다`고 하니 견종법의 효과를 알 수 있다.
농민층 분화
농업기술의 발전은 사회구조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앙법과 견종법으로 노동력이 절약되면서 한 사람이 농사 지을 수 있는 면적이 크게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농민들은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다. 이 시기 전라도의 경우를 보면 소작농가가 전체 농가의 70%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앙법과 견종법의 보급으로 한 사람이 보다 넓은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되자 소작할 땅을 얻는 데 있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럴수록 지주는 소작료를 올린다던가, 전세와 종자대를 소작인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이 많아져 소작 조건이 나빠져갔다. 치열한 경쟁에 속에서 많은 소작지를 확보한 일부 농민들은 부유한 농민으로 성장하여 갔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지조차 얻지 못하게 되었다. 소작지조차 얻지 못하는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가서 자신의 품을 팔아 생활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신세가 되거나, 도적떼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농업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도시로 유입된 이들이 상공업에 종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생산의 분업화, 전문화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상공업에 바탕을 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열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렇듯 농업기술의 발전은 생산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궁극에는 농민층을 분해시키고 평온했던 농촌사회를 흔드는 결과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후기 농업기술의 발전이 단순한 기술의 발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농업기술의 발전이 사회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아울러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