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 의 발달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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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00만 년의 인류역사에서 농업이 시작된 것이 불과 만년 전이라 한다. 그 긴 세월을 捕食포식(狩漁獵수어렵)과 수습(收拾) 그리고 부식(腐食)으로 살아왔던 인류가 그제서야 동식물을 재배사육한다는 식료획득의 혁명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농업의 시작이 어떠한 환경에서 빚어졌는지는 아직도 연구의 여지가 많지만 서부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남아메리카 등 각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특이한 농업문화권을 이루었다고 한다. 자연물에만 의존하던 시대에는 수천 가지 식물이 식용되었으나 농업단계에 들어와서는 100~200가지가 재배되다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주식으로 꼽히는 것이 열 가지 내외로 압축되었다. 이중에서도 밀, 쌀, 옥수수가 3대 주종을 이루고, 아메리카대륙의 원산이며 대부분이 가축 사료로 쓰이는 옥수수를 제외한다면 밀과 쌀이 세계 주식량의 2대맥(2大脈)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각기 서아시아(중동지방)와 동남아시아에서 기원하여 오늘날의 2대주식 곡물로 자리를 굳힌 6000~7000년 내외의 역사에서, 특히 벼 재배의 그것은 아시아의 각국문화를 특징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맥류 재배기원에 관하여서는 고고학적으로 잘 고증이 되어 있는 데 비하여 도작(稻作)의 기원(이와 아울러 벼 재배 지역의 인구증가와 도시·국가형성의 계기)에 관한 해명은 근자까지도 많은 문제를 남기고 있다. 그동안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고고학에서는 물론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민속학, 언어학, 농학(농경, 유전육종), 식물학 등 각 방면에서의 시도로 많은 성과를 올려 그 윤곽이 상당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기원지에서의 전파 경로에 관하여서는 미해결점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으로의 벼 재배 전래과정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왕래하고 있다.
한국의 도작(稻作)기원을 살피기에 앞서 세계적인 그것과 인연이 깊은 아시아의 도류(稻類)의 뿌리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필리핀 소재 國際米作硏究所국제미작연구소(IRRI)의 육종부(育種部)에서 수만 품종을 수집하여 보관하고 연구용으로 공급하는 담당학자의 연구결과를 보기로 한다.
지구의 각주(各洲) 육지는 한 덩어리의 큰 대륙(Gondwana land)이었으며 이 습열대(濕熱帶)에 벼의 먼 선조가 시작되었는데 이 대륙이 1억 3500만 년 전에 남아, 동남아, 마다가스카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남극대륙으로 분열 이산되어 벼의 야생종도 이들 지역에 분포되었다. 인도대륙은 마다가스카르와 남극대륙으로부터 9천만 년 전에 분리되었다. 그러나 재배 벼로는 아시아(남아 및 동남아)의 그것과 아프리카의 그것이 주류이며 이 두 가지는 공동선조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시아형(Oryza Sativa L.)은 히말라야 남쪽에서 북부인도, 북부버마, 월남, 동남중국에 걸치는 광장대(廣長帶)를 이루는 지역에서 재배·진화되었다. 이 초기의 도종(稻種)은 세 가지의 특이한 생태지리학적(生態地理學的)인 품종족(品種族)을 이루어 갔으니 그 하나는 중국온대에서 최초로 재배되어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된 자포니카(시니카 또는 켕)형이다. 인디카형은 열대아시아에서 인근지역으로 퍼졌고 셋째의 자바니카(블루)형은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후에 이루어졌다. 아프리카에서는 Oryza glaberrima라는 재배종이 나이저강 델타에서 세네갈과 감비아로 3000~3500년 전에 파급되었다 한다.
재배도(栽培稻)의 기원에 관하여 히말라야동부설(바비로프, 盛永성영), 印度說인도설, 雲南운남·貴州說]귀주설(柳子明류자명), 아삼·운남지대설(雲南地帶說)등이 있다. 위의 장씨설(張氏說), 도변설(渡邊說) 및 좌좌목설(佐佐木說)은 대략적으로 서로 일치한다. 그 전의 동남아시아 내지 인도 기원설은 중국 남부와 인도 동부를 연결시키는 일대로 생각하는 설로 바뀌어 가는 느낌이 있다. 이는 야생벼의 분포, 재배 벼품종과 야생벼와의 유전적인 관련, 출토탄화미(出土炭化未)의 연대, 기타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한 것이므로 신빙성은 높은 것이다.
명칭이야 어떻든 아시아稻도 기원 중심에서 사방으로 전파하여 나간 栽培稻재배도 종족 중에서 우리에게 직접 관심이 가는 것은 소위 자포니카형의 행로이다. 이 중심지대에서 출발한 벼에서 겨울의 추위와 日長일장 조건에 적응한 비열대성(온대성)인 것들이 양자강을 끼고 화중(華中)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이때 벼는 단독으로 동점(東漸)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잡곡류(조, 기장 등)와 함께 화전이나 원시적 천수전(天水田)에 재배되면서 동쪽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가 있다. 양자강 중류역(中流域)에서는 屈家嶺굴가령 문화 그리고 하류역(下流域)에서는 양저(良渚) 문화 등 유적지에서 많은 벼의 유물이 발견되어 기원전 3000년대 후반기에 이미 水田稻作수전도작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보고 있다. 중부 유역에서 북쪽으로 뻗어 나간 벼 재배는 기원전 3000~2400년 무렵에 용산 문화의 농부들에 의하여 하남과 중부합서의 분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면적은 별로 크지 않았으며 河川彎曲處하천만곡처나 沼澤소택(늪과 못)이 많은 곳에 天水稻作천수도작으로 재배되었을 것이라 한다. 이보다 1000여 년이 지난 때에도 벼의 유물을 남기고 있으나 이때까지도 잡곡(조, 기장, 피) 재배가 우세하였다. 기원전 2000년대에 들어와 禹우의 홍수제어(洪水制御)가 시작된 후로 수도(水稻)재배면적은 크게 늘어났으며 주(周)시대(B.C.1122~255) 말기에 와서는 철제 농기구가 출현하고 수우(水牛)에 의한 밭갈기도 시작되었으며 황하 유역에서는 대규모의 관개공사가 추진되었다. 동주(東周)시대(B.C.255~249)까지는 쌀이 주식화되었다. 이와 같이 화북의 황토지대에서는 일찍이 관개배수(灌漑排水)의 수리시설과 경지구획의 기술이 발달하여 이 선진 문화가 양자강 유역의 수도재배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고대에 있어서의 도(稻), 미(米), 답(沓)에 관한 문헌 또는 금석(金石)기록이 한국에서는 특히 빈약하며 도미(稻米)관계 유물 역시 출토가 아직도 적은 편이지만 매우 중요한 지리적 분포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1920년에 경상남도 김해패총에서 발굴된 탄화미(炭化米)는 함께 나온 중국고전, 철도끼 등으로 보아 1~2C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1927~1928년에는 충청남도 부여의 부소산(扶蘇山)에 있었던 고군창지(古軍倉址)에서 미(米), 대맥(大麥), 두류(豆類) 등의 탄화물이 출토되어 백제말기(1300~1400년 전)의 것으로 추측하였었다. 그러나 근자의 재조사에 의하여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판명되었다. 그 후 경주 은령총(銀鈴塚)(5C 초 축조로 추측)에서는 벼겁질이 나왔고 역시 경주의 황오리(皇吾里) 제 16호분에서도 다수의 벼껍질이 발견되었으며 경상남도 성주군(星州郡) 성산동(星山洞) 고분에서도 벼껍질이 나왔다. 북한에서는 서부일대의 무문토기편에 벼자국이 있었다는 횡산(橫山)보고가 있었다.이상이 1945년 이전까지의 한국의 도미(稻米)관계 출토물의 보고이다. 따라서 신빙성이고 고대로 올라가는 것이 한반도의 동남 구석에 몰려 출토된 것이라 당시로서는 도작(稻作)의 남방도래설이 유력하였었다.
벼(Oryza)라는 과(genus)는 Gondwana land 대륙에서 시작하여 다음으로 초대륙(Super Continent)의 분열에 이어서 아프리카, 남아메라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그리고 오세아니아(대양주)의 습지대 지역에 널리 분포를 보게 된 것이라 한다. 이들 식물 중에서 아시아 재배 벼(O. sativa)와 서아프리카 재배 벼(O. glaberrima) 두 종류가 아득한 태고 때의 공통 선조에서 유래하여 진화(야생 다년생→야생1년생→재배 1년생) 과정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각기 평행적으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밟아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벼의 재배는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고대 인도에서 발상하였으리라는 것이 유력한 설이다. 그 연대는 기원전 1500~2000년으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1970년경에 태국 중부의 논녹타(Non Nok Tha)에서 발굴된 벼 껍질은 기원전 3500년이라는 연대를 보여주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벼 재배는 인도에서 처음 시작되어 중국과 동남아 각 지역(말레이지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으로 파급되었는데 재배 기술의 발달(못자리 만드는 것과 모내기 등)은 북부 중국과 남부 중국에서 이루어졌고 그 후에 동남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수도(水稻)재배는 육도(陸稻) 재배를 거쳐 전파해 갔다 하며 이러한 현상은 동남아시아의 산간지대에서도 볼 수 있어 벼 심는 법도 변답식(돌려 가며 심기)에서 영구답직파식(永久沓直播式)으로 진전하고, 이어서 둑을 만드는 논으로 이식하는 모내기법으로 발달한 것이다.
아시아의 재배 벼는 광범한 전파에 따라 생태지리학적인 벼의 형(인디카, 자포니카, 자바니카의 3형)을 낳았고, 또 아시아 몬순(계절풍)지대의 독특한 재배형인 육도(陸稻), 답도(沓稻), 심수도(深水稻) 등을 형성케 하였다. 아프리카의 벼 재배종은 아시아의 그것보다 뒤늦게 이루어졌고 그 파급도 국지화되었다.
인도에서 이와 같이 출발을 본 벼 재배는 다음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도 북부에서 사통팔달로 아시아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가 기후, 우량, 지세, 기호 등에 따라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은 세 가지 생태지리학적인 도종(稻種)과 건습(乾濕)에 따른 재배적 이형(異型)을 낳았는데 이를 쌀과 벼에 대한 어휘의 분포와 비교하면 자못 흥미 있는 일치점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는 이와 접경한 인도, 부탄, 네팔, 미얀마 북서부, 라오스 등을 통하여 전파되었으리라고 보는데, 소위 자포니카(시니카)형은 양자강 기슭과 중국 남해안을 끼고 동점북상(東漸北上)하여 화북(華北)까지 이르렀다.
인디카형은 남부 중국에 전파되어 한때 '선'이라는 이름으로 재배되었다. 호남성 Mias-ti-kou라는 곳에서 출토된 벼 껍질은 기원전3000년대로 연대 측정이 나왔다 한다. 벼의 모내기 재배기술은 漢한시대(23~220 A.D.)에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이 이식법과 아울러 관개법, 경작법 등에 있어 세련된 재배기술이 개발되어 그 영향이 아시아 각 지역에 오랫동안 미치게 되었다.
한반도로의 벼 재배기술 도입이 중국대륙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출구가 많은 광활한 지역에서 어느 경로를 밟아 우리의 어느 고장을 입구로 들어왔는가가 문제인데 황하지역에서 출발하여 만주를 거쳐 들어오는 경로, 양자강 하구지역에서 해로(海路)를 타고 한반도의 남부로 상륙하는 경로가 가능하다. 일본 학자들 중에는 남방로(양자강구에서 직접 북부 규슈로 또는 아주 남쪽에서 대만과 유구 등을 거쳐 규슈의 남단으로 유입)를 강조하는 나머지 벼의 재배가 규슈를 거쳐 한반도 남단의 김해지구로 진입되었을 것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이가 있다.
북방설(황하지역에서 요동반도 또는 산동반도를 경유하여 평안도 또는 황해도로 들어왔을 것이라는)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 주장을 뒷받침할 출토물이 근자에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남방설을 일본 학자들 일부에서 강력히 내세우는 큰 이유는 탄화미나 벼 껍질(또는 벼의 누른 자국:압흔)의 출토가 김해와 신라 고분 수개처에서 이루어진 데 있었기에, 북방설을 주장한 자는 시루와 벽화에 그려진 시루의 출토(북한에 상당수가 있음), 철제 농구의 출토, 소의 전래 경로, 언어적인 면, 재배방식의 변천 등에서 북방 전래의 가능성을 재삼 강조하여 왔었다. 그러던 차에 벼 껍질, 벼 자국, 탄화미 등이 경남·북을 위시하여 전북, 충남에 가끔 발굴되더니 근자에는 경기도 여주에서 탄화미가 출토되면서 화제가 된 바 있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북한의 평양 남경(南京) 유적에서 기원전 1000년경으로 추정되는 탄화미가 수수, 조, 기장들과 함께 발굴되었다. 이와 같이 쌀에 관련된 출토물이 남한 각지와 북한에 계속 나타나게 됨으로써 벼 재배의 북방 경유를 지지할 증거가 생긴 셈이다. 특히 이 중에서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에서 선사 주거지가 발굴된 것은 원자력연구소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하면 기원전 600~700년대로 소급된다고 한다.
한반도의 탄화미 출토 분포가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으로 되어 있으며 더구나 일본 규슈 북부에 위치하는 이다즈께(탄화미 출토가 많았음)와 연결한다면 벼 재배의 전래 경로가 직선 코스를 이루게 된다.
벼는 본래 호온(好溫), 호습성(好濕性) 식물이지만 재배관리법에 따라 건조와 한랭에도 적응하는 작물로 육성할 수 있다. 이 장점이 벼 재배가 중국대륙을 한없이 북상할 수 있게 하였던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 하나가 건농법(乾農法)에 속하는 건답법으로 지금도 네팔에서는 이와 비슷한 벼 경작이 우세하다고 한다. 건답법이란 밭에서 볍씨를 파종하여 처음에는 밭벼(육도)를 기르듯이 가꾸다가 장마 때를 만나면 물을 채워 논벼로 키우는 방법이다. 이 건답식 벼 재배는 우리 땅에서도 조선시대 초기까지 많이 실시되었으며 해방 전까지도 평안남도 및 황해도의 서부지역에서 독특한 건답법을 볼 수가 있었다. 여기에다 순 밭벼 재배방식까지 고려해 넣는다면 벼 재배 북방 도래설을 굳이 부정할 이유가 없게 된다. 사실 벼의 모내기법도 漢한시대에 많이 개발된 것이며 황하 유역에서 효과를 보아 북부로의 모내기 전파에 큰 힘이 된 것이다. 즉 황하 유역을 무대로 삼은 한문화 아래에서 수도(水稻) 재배법은 한지(旱地) 농업 발달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아울러 관개법(灌漑法)의 적용으로 더욱 진전을 보았다. 이 발달된 벼의 경작법이 漢四郡한사군에 전파가 안되었을 리 없을 터이고, 이보다 앞서서도 육도(陸稻) 재배법, 건답법으로 벼의 재배가 더 일찍이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짙다. 황하 문화의 벼 가꾸기가 요동이나 산동 등을 통하여 우선 한반도의 서북부로 들어온 다음 그 보급이 남으로 남으로 속하게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면서 점차로 양자강 하구를 출발한 벼 재배기술의 전파도 한반도의 남서해안에 마치기 시작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참고로 쌀과 벼에 관한 명칭에 대해선, 고대 인도의 쌀의 명칭은 '살리'와 '브리히' 등이었는데 이것이 티베트, 몽고, 만주를 거쳐 우리의 고어인 브살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브살은 베 또는 벼와 살의 합어(合語)일는지는 모른다. 한편으로 찹쌀의 차는 '차울'(벵골·아샘의 말)에서, 멥쌀의 메는 중국 강남의 말인 '미'(粳米갱미)에서 온 것일 것이다. 그리고 닙쌀(입쌀)은 브살이 읍쌀, 입쌀, 닙쌀로 전와된 것이 아닌가 하며, 나락이라는 말은 곡식의 뜻을 가진 옛말인 낟에서 낟알, 날, 나락으로 변하여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또 제삿밥을 메라고 하고, 옛말에 진지(밥)를 뫼라고 한 것도 멥쌀의 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늦었지만 범어(梵語) '브라스'는 '파디'(paddy:수마트라)로 되어 오늘날 영어에서도 이것이 벼와 논을 뜻하는 것이 되었다고 한다.